본문 바로가기

공공 데이터

[공공데이터] 전라남도 곡성군 문화재 지표 유적지

반응형

[공공데이터] 

전라남도 곡성군_문화재지표_유적지

전라남도 곡성군의 문화재지표중 유적지 데이터 정보(향토문화 유적명, 문화유적 지정번호, 향토문화유적구분, 향토문화 유적 종류, 소재지 도로명 주소, 위도, 경도, 문화재 지정일자 등)

 


 

■ 관련 데이터

전라남도 곡성군 문화재 지표 유적지

 

향토문화유적구분 향토문화 유적종류 소재지 도로명주소 지정일자 소유주체구분 규모 조성시대 이미지정보 향토문화 유적소개 관리기관 전화번호
유형문화유적 승탑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1963-01-21 국유 높이 262.5cm 통일신라(861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jpg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대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대안사가 속한 동이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승탑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71 1963-01-21 국유 높이 3m 고려시대(945년경)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jpg 대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대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탑비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71 1963-01-21 국유 귀부높이 108cm, 폭 134cm, 이수 높이 98cm, 폭 160cm 950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jpg 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불구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1988-06-16 국유 지름 92cm 조선시대(1447년(세종 29년), 개조 1454년 (단종 2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 곡성 태안사 청동 대바라.jpg 바라란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하는 타악기이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이 바라는 지름 92㎝로 크기가 크며, 제작 방법이 우수하다. 국내에서 제일 큰 바라로 외곽의 일부가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없이 내려왔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 치기보다는 어느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불탑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가곡길 341-34 2001-09-21 국유 높이 약 6.5m 고려시대(중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jpg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가곡리 오층석탑의 맨 아래 바닥돌은 시멘트로 만든 기단에 묻혀 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 탑의 아래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윗기단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다.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 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 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다. 특히, 매층 지붕돌 위에 또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 석탑은 맨 위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보물)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조각기법이 매우 세련되며 안정감을 보이는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백제 옛 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불구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2002-10-19 국유 높이 96.5cm, 입지름 65.7cm 조선시대(1581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6. 곡성 태안사 동종.jpg 태안사에 소장된 조선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종이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리고 어깨위를 돌아가며 입화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연뢰를 나즈막하게 돌출표현하였다. 몸체의 하대는 종구에서 조금 올라와 배치되었는데,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불화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도림로 175(월봉리 337) 도림사 2002-07-03 국유 세로 7.76m, 가로 7.19m 조선시대(1683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7. 곡성 도림사 괘불탱.jpg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하는데 도림사 괘불탱은 중앙에 석가불과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석가삼존도 형식이다.  크기는 길이 776cm, 폭 719cm로, 중앙의 본존불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본존불 좌우에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의 문수보살은 보관에 조그만 부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오른쪽 보살과 다르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계오·삼안·신균 등의 세 화원 비구가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화기가 있어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자료가 귀한 석가삼존불형식으로 그 색채구성과 문양표현, 인물의 형태 등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17세기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061-362-2727
유형문화유적 문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2006-04-28 국유 가로 570.0cm(書本 524.0), 세로 39.0cm 조선시대(1401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8. 마천목 좌명공신녹권.jpg 마천목좌명공신녹권은 조선 태종 1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上將軍) 마천목(馬天牧)에게 발급한 것으로 필사본이다.   좌명공신은 조선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로 마천목은 후에 태종(1367-1422)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稱下)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하였는데 이 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이다. 조선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식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은 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공신도감 구성원은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초기에 지정된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국보 232호)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을 상기하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02-3701-7500
유형문화유적 불화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도림로 175 2017-03-08 국유 세로 287cm, 가로 284cm 조선시대(730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9. 곡성 도림사 아미타여래설법.jpg 이 작품은 도림사 보광전의 후불화로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여래설법도로 1730년 철매(哲梅)의 증명 아래 수화원(首畵員) 채인(彩仁), 진행(眞行), 즉심(卽心), 각천(覺天), 책활(策活) 등이 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을 주도한 채인과 즉심은 1723년 흥국사와 1725년 송광사 불화 제작 때 의겸(義謙)을 수화사로 모시고 함께 작업을 한 대표적인 의겸파 화원이며, 진행과 각천은 1730년 운흥사 괘불 조성 때 의겸을 도왔다. 또한 의겸을 비롯해 채인, 덕민, 지원, 각천, 책활 등은 같은 해(1730년) 공주 갑사의 ‘석가여래삼세불도’를 함께 제작하였을 만큼 이 들은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림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의 제작 의도와 달리 단독의 후불벽면에 걸기 위해 조성된 불화로서, 갑사의 그것 보다 좌우 폭이 넓어졌으나, 인물의 표현이나 구성, 묘선, 색채, 문양 등 도상이나 양식의 면에서 대체로 갑사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의 화풍이 그의 유파 화원들에게 어떻게 스며들고 발전되어 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특히 적·녹색의 강한 색 대비 속에 백색, 황토, 양녹, 갈색 등 부드러운 중간 색조가 안정적으로 뒷받쳐 주고 있는 설채법, 그리고 주저 없는 유려한 필선, 중후한 이목구비를 가진 상호 등에서 1724년 송광사 응진전 영산회상도, 1725년 송광사 영산회상도 등 당대의 최고의 화승(畵僧) 의겸(義謙)의 화풍을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를 비롯한 팔대보살, 그리고 권속들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짜임새 있는 화면구성을 갖추었고, 정취하고 유려한 필선과 중간 톤의 안정된 색감과 문양을 통하여 우수한 화격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기 유행한 화풍과 화사간의 교류를 통한 화맥(畵脈)의 전승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061-362-2727
무형문화유적 전통 기예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죽산길 113 1970-07-22 사유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0. 곡성 돌실나이.jpg 돌실나이는 곡성군 석곡면에서 삼베를 짜는 일(길쌈)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돌실나이라 부르는 것은 석곡면의 원래 이름이 돌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베는 ‘베’라고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마·마포·포 라고도 한다. 곡성의 돌실나이는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여 삼베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061-363-2011
무형문화유적 전통 기예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공북길 11-19 1978-02-23 사유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1. 장도장(낙죽장도).jpg 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장도장이라 한다. 장도는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로 일상생활이나 호신용 또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성인 남녀들이 호신용이나 일상 생활용으로 지니고 다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대부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휴대했다.낙죽장도의 인간문화재는 지정 당시 한병문 장인(匠人)이었다. 조선 선비 이교호 훈장에서 이어서 재종조부인 한기동(1873~1959)으로부터 전통 낙죽기법을 배워 익혀 전승하였고 아들인 한상봉에게 이어졌으며, 그의 손자 한준혁이 배우는 중이다 061-363-2011
민속자료 주거건축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청계동로 908-4(제월리 286) 1984-01-14 사유 1225㎡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2. 곡성 제호정 고택.jpg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풍수지리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자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로 '군지촌정사'는 사랑채의 이름이며, 안채, 대문간채와 더불어 전체를 이루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다고 하나 안채는 19세기 초 정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一'자형으로 서쪽부터 2칸의 부엌이 위·아래에 있으며, 그 옆에 큰방이 있는데 앞·뒤에 툇마루를 깔았다. 전면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뒷쪽에는 도장과 작은방이 있다. 큰방과 도장 앞은 문시설 없이 개방되었고, 작은방 앞은 문을 달아 가로막았다. 건물은 높이 쌓은 대 위에 있고, 방 앞쪽에는 큰방의 굴뚝시설로 연기가 나가는 구멍이 있다. 안채의 마당 앞에 있는 행랑채의 동쪽에 사랑채이면서, 동네사랑인 군지정사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접근하기 쉽게 하였다. 서쪽부터 사랑방이 위·아래로 있으며, 그 옆에 대청이 놓여 있는데 개방되었다. 방 앞·뒤로는 모두 마루가 깔려있다. 대문간채는 '一'자형으로 안채보다 훨씬 늦게 지었으며, 대문간을 중심으로 동쪽에 2칸 방이 있고 서쪽에는 외양간과 헛간이 있다. 집 앞 언덕 위에는 18세기에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자가 하나 있다. 061-363-2011
무형문화유적 전통공연예술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죽동길 46-1 2002-04-19 사유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3. 곡성 죽동농악.jpg 호남 좌도농악의 계보를 잇고 있는 전남의 대표적인 마을로 좌도농악은 호남 우도농악, 남해안지역의 농악과는 달리 쇠가락과 상쇠의 부포놀음이 발달하여 섬세하고 어려운 기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가락과 동작이 빠른 편이고 단체기술이 발달되었다. 죽동농악은 마당밟이나 당산굿과 같은 마을굿에서 시작하여 인근마을에 걸궁을 하는 들당산과 날당산굿, 그리고 판굿까지 한 바탕 전체를 전승하고 있어서 다른 어떤 지역의 농악보다 화려하고 많은 보유 종목을 자랑한다. 죽동마을은 농악의 전통을 잘 전승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연주와 사회활동을 통해 그 전승을 확고히 해나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풍물강습에 맞도록 정비된 풍물 전수관과 앞마당에서는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강습을 실시하고 있다. 박대업씨는 기창수씨와 강순동씨의 대를 잇는 기능 보유자로 죽동 농악을 이끄는 상쇠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죽동농악은 1998년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종합 최우수상과 1999년 한국 민속예술축제에서 우수상(문화관광부장관)등 전국대회에서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061-363-2011
무형문화유적 전통 기예 전라남도 곡성군 고달면 백곡길 21-4 2013-12-19 사유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4. 초고장.jpg 초고장(草藁匠)은 짚과 풀로 전통 생활용구와 농업 도구, 민속신앙 도구 등을 만드는 기술이다. 재료의 변화로 잊혀져가는 기술이 돼가고 있다. 곡성 임채지 장인이 전통 짚풀공예 기술을 원형으로 체득해 전승해 오고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정려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궁동길 101-6(삼오리 산60) 1974-09-14 사유 734㎡ 조선시대(1805년(순조 5))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5. 곡성 충렬문.jpg 이곳은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었던 박언배와 그 부인 이씨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이다. 박언배는 옥과의 사족으로  박연( 朴堧 )의 후손이다.  조선 인조5년(1627)  청나라 군사가 내습하자 의병장으로 안주( 安州 ) 싸움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부인 이씨도 또한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 충렬문은 순조5년(1805)에 건립한 것이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71 1981-10-20 국유 73.5㎡ 조선시대(후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6. 태안사 능파각.jpg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71 1981-10-20 국유 48㎡ 조선시대(후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7. 태안사 일주문.jpg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옥과7길 13(옥과리 14-1) 1981-10-20 국유 4172㎡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8. 옥과향교.jpg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옥과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래의 자리가 황산이었는데 율정으로 옮겼고, 조선 영조 31년(1755)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에 수리하였으며, 고종 광무 2년(1898)에 다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앞쪽 낮은 곳에는 배움의 공간으로 명륜당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제사공간으로 대성전을 두고 있다. 이곳은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 중 『양목재절목』, 『향교전곡출입절목』 등은 옥과향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료로 간주된다. 061-360-8379
유형문화유적 정자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청계동로 908-8 1988-03-16 사유 91.6㎡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19. 곡성 함허정.jpg 조선 중종 38년(1543)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 일명 호연정이라고도 한다. 증손자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으며 5대손 심세익이 고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0년에 수리를 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을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다.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 울창한 숲, 멀리 무등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심광정이 세운 군지촌정사(중요민속자료 제155호)가 있다.  당대 학문을 익히던 선비들의 수양지와 휴식처를 빼어난 경치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목판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4길 29 1999-07-05 사유 수량 87판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0. 곡성 도동묘 회언실기목판.jpg 고려시대 문인이자 유학자인 안향(1243∼1306)의 시문집『회헌실기』를 간행하기 위한 목판으로, 영조 42년(1766) 죽계서원에서 간행한 초간본 목판 55매와 고종 22년(1845)에 간행한 중간본 목판 32매 등 총 87매이다. 안향은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 감찰어사, 좌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다녀오면서 주자학의 학풍을 보고, 주자 관련 서적을 베껴오고,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그를 일러 ‘동방의 주자’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성’이며, 여러 서원에서 그를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그의 영정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목판은 판각과정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 인쇄사 측면에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현재 전남 곡성의 도동묘에 소장되어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목조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도림로 175 2005-07-13 국유 아미타불 높이 122cm, 관음보살 높이 119cm, 대세지보살 높이 117cm 조선시대(아미타불: 1665년, 관음보살·대세지보살:1680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1. 곡성 도림사 보광전 목조 아미타삼존불상.jpg 보광전의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삼존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방형의 수미단위에 3단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앉아 계신다. 아미타불은 복장 발원물에 강희 3년 기사년에 조성되었다 하나 강희 3년은 갑진년이어서 강희 4년 기사년 즉, 1665년으로 보는것이 바르다. 아미타구품인중 중품하생의 수인을 취한다. 관음대시지보살은 복장발원문에 의해 강희 19년 즉 1680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크기는 아미타불 높이 122㎝, 관음보살 높이 119㎝, 대세지보살 높이 117㎝이다. 061-362-2727
유형문화유적 석조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당동길 36-7 2005-07-13 국유 높이 200cm 고려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2 .곡성 당동리 석조여래좌상.jpg 당동리 사지 가지구의 이희극씨 집 밭에 있었던 것을 마을 입구에 우산각을 마련하고 나지구의 석불좌상과 함께 그 안에 모셔두었는데 몇번 도난을 당하자 1986년 3월에 마을 오른편 산자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석불은 좌우 어깨와 등에 불상을 새겼는데 이른바 사면불을 형성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광배를 따로 만들어 끼웠을 것으로 보여지는 흠이 어깨 뒤쪽 등 부분에 나 있다. 상호와 손 및 대좌가 많이 훼손되었다. 불상은 모두 좌상이며 배면불만 광배를 새겼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인다. 오른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이며 두손 모두 훼손되어 상태가 좋지 않으나 향마촉지인으로 여겨진다. 크기는 높이가 200㎝에 달한다. 방형대좌는 중대석이 없으나 1966년 정영호가 조사할 당시의 사진에는 중대석이 보인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목조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교촌길 71 2013-12-19 국유 전체높이 72.4cm머리의 높이 14.3cm, 머리의 너비 9.2cm, 귀길이 9.7cm, 어깨너비 28.5cm, 가슴너비 11.7cm, 무릎너비 39.8cm, 무릎높이 12,1cm 조선시대(1706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3. 곡성 서산사 목조 관음보살좌상.jpg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원통전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래 제작처는 성덕산 관음사의 대은암(大隱庵)이고 1706年(강희 45, 숙종 32)에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관음사 원통전 소실의 혼란 와중에 1730년(옹정 8, 영조 6)에 옥과 성덕산 관음사 대은암의 중종으로 조성된 동종과 함께 화마를 피해 서산사로 옮겨 모셔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상에서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황초폭자(黃梢幅子: 노란 보자기)에 쌓은 후령통(候鈴筒),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사경, 『능엄경(楞嚴經)』 4책, 진언문 28장 등의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이미 복장은 불상 개금시 개봉되어 원래의 모습은 훼손되어 있었다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관음보살상이 1706년(강희 45, 숙종 32)에 진열(進悅)과 태원(太元) 두 스님이 조성하였음이 밝혀졌다.또한 관음보살좌상의 원 봉안처는 전라좌도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대은암으로 이 보살상은 해천(海天) 스님이 대은암에 불상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불상 조성의 큰 소원을 품고 1706년 2월 25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약 2개월의 기간을 거쳐 4월 5일에 완성하였고 4월 8일에 복장을 봉납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서산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발원문의 출현으로 불상 조성 동기, 봉안처, 조성시기, 조각승, 시주자, 관음사 주석 승려 등 거의 모든 사항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초반의 불교조각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사례가 될 것이다. 061-363-2459
유형문화유적 불구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교촌길 71 2015-08-06 국유 총 높이 69.0cm종신높이 48.0cm, 입지름 43.7cm, 天板高(천판높이) 8.0cm, 천판지름 29.5cm, 용뉴높이 15.0cm 조선시대(1730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4. 곡성 서산사 동종.jpg 현재 西山寺 觀音殿 내에 봉안되어 있는 이 범종은 정상에는 쌍룡의 龍가 있고, 半球形의 天板을 쌍룡이 7개의 발로 딛고 있다. 天板과 鐘身의 경계에 융기된 1條의 太線으로 천판과 종신을 구분하였다. 이 太線 바로 밑에는 上帶 대신하여 지름 3.2㎝의 圓座에 梵字를 새긴 圓形梵字文 8개를 일정 간격으로 장식하였고, 종신 부분에는 4개의 乳廓(세로 13.5㎝ × 가로 13.0㎝)을 배치하였다. 鍾乳는 꽃받침 위에 자방이 돌출된 9개의 유두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의 문양은 사격자문을 엇비켜 새긴 文樣帶로 장식하였다. 유곽의 사이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세로 18.5㎝) 4軀를 배치하였는데, 보살입상은 頭光과 寶冠을 갖추고 합장한 모습으로 線彫로 彫飾하였고 撞座는 표현되지 않았다. 下帶에는 별도의 문양이나 조식은 없으며 다만 陽鑄된 造成記 銘文이 있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擁正八年庚戌/ 四月日玉果/ 觀音寺 大隱庵/ 中鐘造成/ 施主秩/ 前將官安武/ 嘉善朴大鶴/ 通政大夫雪澄/ 通政大夫一行/ 許命生/ 許在云/ 色蘭本菴秩太虛堂 極初/ 敬信/ 堂頭 一行/ 掌務 好性/ 別座 覺心/ 書記 明哲/ 通善 / 化士 德訓/ 天印/ 太照 / 天俊本寺住持通政 桂根/ 萬淨/ 三綱 說草/ 及玄위의 명문으로 보아 이 종은 옥과 관음사 대은암 중종으로 조성되었다. 太古寺寺法에 “大隱庵 在全羅南道谷城郡五山面聖德山觀音寺山內 大本山松廣寺末寺”라 하여 대은암은 관음사 산내암자이며, 송광사 말사라 하였다. 이 종은 擁正八年庚戌四月은 1730년(영조 6) 4월에 조성하였다. 시주는 前將官 安武, 가선대부 朴大鶴, 通政大夫 雪澄, 通政大夫 一行, 許命生, 許在云,  色蘭 등이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색난은 1698년 고흥 능가사 범종 주조 때에 시주자 명단에 보이며, 1711년 능가사 기와 조성 때에도 시주를 하였던 스님이다. 그리고 색난은 1680년 화순 영봉사 불상(현 광주 덕림사 소장), 1683년 능가사 능인전 불상(현 서울 지장암 소장), 1684년 강진 정수사 나한전 불상(현 강진 옥련사 소장), 1689년 목조아미타삼존불감(현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1689년 목조지장삼존불감(한국불교미술박물관 소장), 1693년 구례 천은사 불상, 1694년 화순 쌍봉사 불상, 1700년 영암 축성암 나반존사상, 1701년 대흥사 응진전 불상, 1703년 화엄사 각황전 불상, 1709년 고흥 금탑사 목조보살좌상(현 고흥 송광암 소장) 등을 조각하였던 유명한 조각승이었다. 색난과 함께 불상을 조성하였던 조각승은 충옥, 초하, 득우, 일기, 모현, 도헌, 행탄, 추붕, 추평 등 많았으며, 그는 고흥 능가사 스님이었고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대은암의 큰 스님은 太虛堂 極初였으며, 화주는 德訓이었다. 本寺였던 관음사 주지는 통정대부 桂根이었다.  이 범종은 두 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종뉴와 입상화문대가 보이지 않는 점, 유곽이 상대에 서 따로 떨어져 아래에 있는 점과 당좌가 표현되지 않은 점, 또한 종신에 합장한 보살입상이 장식되어 있고 범자문 등이 표현된 점, 종신에 명문을 새긴 것 등이 朝鮮時代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어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이 종의 크기는 총 높이 69.0㎝, 종신높이 48.0㎝, 입지름 43.7㎝, 天板高 8.0㎝, 천판지름 29.5㎝, 용뉴높이 15.0㎝이다. 061-363-2459
유형문화유적 문서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전기길 67-1(연반리 275) 2015-08-06 사유 수량 177점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5. 곡성 연운당 고문서.jpg 연운당은 전남 곡성군 석곡면 연반촌에 자리 잡은 선산유씨 곡성입향 본가이고, 현재는 후손 유종표가 소장 고문서를 관리하며 살고 있다. 곡성 능파리로 들어온 선산유씨 입향조는 조선조 중기의 巨儒인 유희춘(1513-1577, 眉巖)의 증손자 柳益淸(1582-1660, 凌湖)인데, 그는 許穆과 교우하고 병자호란에는 창의하여 선비 정신을 드높였던 인물이다.능파리에서 연반촌으로 이주한 인물은 유익청의 현손인 진사 柳復三(1729-)이다. 유복삼은 유희춘의 학덕을 현창하는 일에 평생의 노력을 쏟았으며, 그 결과로 현재 연운당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고문서가 약 140여건 정도 소장되어 있다.유복삼은 유희춘의 문묘배향을 추진하고, 『眉巖集』과 「經筵日記」「眉巖日記」등의 간행에 앞장 선 인물이다. 연운당 소장 고문서에는 敎旨, 試券, 乞科文, 上疏, 上書, 眉巖日記抄, 經筵日記抄, 傳記, 完議, 明文, 戶口單子, 準戶口, 所志, 山圖, 簡札 등 다양한 기록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그중에서도 眉巖日記抄, 經筵日記抄, 全羅道五賢陞疏, 五先生祠宇請建疏, 達川忠義錄 등은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이다.연운당 자료에는 古書도 다수 소장되어 있었는데 625사변으로 연운당이 소실될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유종표씨의 모친(평산신씨, 밀양손씨)이 고문서 상자를 들고 나와 다행히 소실을 면한 고문서 일부만 보고되어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목조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설옥길 81-158 2017-07-27 국유 전체높이 83.0cm상호 높이 17.0cm, 상호 너비 22.0cm, 귀 길이 12.3cm, 어깨너비 38.0cm, 가슴너비 15.2cm, 무릎너비 59.0cm, 무릎높이 17.0cm 조선시대(1754, 영조 30)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6. 곡성 수도암 목조 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jpg 조선시대 후기의 목조 보살상으로 조성연대(1754년)와 원봉안처(관음사 무설암), 조각승(계초 등 5인), 존상(尊像)의 명칭, 연화질 등을 알 수 있고, 조각양식도 뛰어남.신체 비례와 균형이 어울리고, 단정한 얼굴과 화려한 보관 표현 등 당대를 대표할만한 우수한 조각상으로 발원문과 묵서명, 묘법연화경, 능엄경 등의 복장유물도 확인되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있음. 061-362-5716
기념물 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신숭겸로 226(구룡리 180) 1981-10-20 사유 443㎡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7. 용산재.jpg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927)의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은 왕건을 도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몇 년 뒤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크게 분개한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신숭겸이 태조를 구하고 후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유적지에는 제사를 모시는 용산재와 구룡문, 유허비, 유허단 및 비각이 있으며 해마다 9월 중에 제사를 지낸다. 061-363-2011
기념물 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양서원길 42(덕산리 36) 1981-10-20 사유 1,901㎡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8. 덕양사.jpg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927)의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은 왕건을 도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몇 년 뒤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크게 분개한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신숭겸이 태조를 구하고 후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유적지에는 제사를 모시는 용산재와 구룡문, 유허비, 유허단 및 비각이 있으며 해마다 9월 중에 제사를 지낸다. 061-363-2011
기념물 경승지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도림로 175 1987-01-15 국유 25115.9㎡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29. 곡성 도림사 계곡.jpg 곡성 도림사계곡은 해발 735m의 동악산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동악계곡, 성출계곡과 더불어 아홉 구비마다 펼쳐진 넓은 바위 위로 맑은 물줄기가 흐른다.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이 흐르는 물줄기는 연중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늙은 소나무들과 폭포들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예부터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9개의 넓은 바위에는 선현들이 새긴 문구가 남아있어 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계곡 정상부근에는 신선이 쉬어 간다고 전하는 높이 4m, 넓이 30평에 달하는 신선바위가 있으며,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도림사가 있어 계곡과 더불어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다. 월봉계곡으로도 불리는 도림사계곡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061-362-2727
기념물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대흥리길 33-35 2006-12-27 국유 길이 647m 삼국시대~고려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0. 곡성 당동리 산성.jpg 당동은 죽곡면의 남서부에 있는 마을로 예봉을 등지고 있고, 남쪽에는 보성강이 크게 곡류하면서 형성된 평지가 펼쳐져 있다. 당동리성은 죽곡의 당동리와 석곡의 능파리의 경계지점인 예봉과 그 남쪽에 있는 구릉의 능선상에 있다. 당동리성은 석성으로 성벽의 대부분은 붕괴되었고 내부에는 와편이 산재되어 있다. 남쪽 중앙부에는 우물터와 망태터가 있고, 북서쪽 모서리 성벽은 민묘의 호석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벽은 남쪽에 비해 북쪽이 잘 남아 있는데 가장 잘 남아있는 부분은 폭 5m 높이 10m이고 그 둘레는 약 500m 정도이다. 061-363-2011
민속자료 민속신앙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옥과2길 3-5(옥과리 155-1) 1976-09-30 국유 지름 92cm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1. 옥과 성황당 목조신상.jpg 옥과 성황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남녀 한 쌍의 목상(木像)이다.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여기던 대상물로, 남자상은 서 있고, 여자상은 앉아 있는 모습인데, 높이가 각각 84㎝, 68㎝이다.  남자상은 무당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사제복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끈을 매었는데, 끝이 길게 늘어져 있다. 둥근 얼굴에 크고 굵은 눈썹이 표현되었고 눈이 돌출되었다. 여자상은 머리에 고깔을 쓰고, 양 손가락 끝을 붙여 아래로 향하게 하였는데, 무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얼굴 표현은 남자상에 비해 정교하며 자세도 다소곳하다. 남자상은 고려 명종 때의 학자였던 조통 장군으로 전한다. 여자상은 장군의 처라는 설도 있고, 장군을 사모하다 한을 품고 죽은 공주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신상은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을 신격화한 것이거나 추앙받을 만한 인물을 신격화한 것으로,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다양한 신들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061-362-5306
유형문화유적 불교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도림로 175 1984-02-29 국유 4563.9㎡ 삼국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2. 도림사.jpg 도림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 2년(876) 도선국사가 고쳐 세웠는데 이 때 도인들이 숲같이 모여들어 절 이름을 도림사(道林寺)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절 안에는 작은 규모의 법당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응진당, 지장전, 약사전,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보광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이 절에는 조선 숙종 9년(1683)에 제작된 도림사 괘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을 보관하고 있다. 061-362-2727
유형문화유적 불교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1984-02-29 국유 28063.4㎡ 통일신라(742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3. 태안사.jpg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불교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성덕관음길 453 1984-02-29 국유 4274㎡ 삼국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4. 관음사.jpg 전라남도 성덕산에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3년(300) 성덕보살이 세운 절이다. 절 이름은 성덕보살이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 5번째로 넓혀 지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선조 37년(1604) 5년 동안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근세에 와서는 1912년 영담화상이 전가람을 고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과 금동관음보살이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들로 금랑각을 지나면 가운데에 법당인 원통전이 있고 그 왼편과 오른편에 벽안당과 요사채 등이 있다. 061-362-4433
유형문화유적 정려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길 13-10(합강리 산 16-4) 1984-02-29 국유 2143㎡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5. 유월파장군 정열각.jpg 유월파 정열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유팽로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3년(1625)에 세운 건물이다. ‘월파’라는 이름은 유팽로 장군의 호인 월파에서 비롯되었다. 유팽로 장군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과거에 급제하고도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부모에게 효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호남지역으로 침입하고자 금산에 집결한 왜적을 공격하다가 고경명·안영 장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유월파 정열각이 있는 옥과면 북쪽 끝에는 장군의 말 무덤이 있다. 유팽로 장군이 금산 싸움에서 전사했을 때 그의 말이 장군의 머리를 물고 먼 길을 달려 그의 생가까지 갔고 부인이 장군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말은 마구간에 들어가 9일이나 여물을 먹지 않은 채로 계속 울다 죽었다고 한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교촌길 85(교촌리 190) 1984-02-29 국유 2826㎡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6. 곡성향교.jpg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곡성향교는 조선 선조 3년(1570)에 지었다고 전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재위1506∼1544) 이전에 세운 것으로도 보인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를 갖추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서재는 기숙사이다. 이외의 건물로는 내삼문·전사청·교직사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061-363-4133
유형문화유적 석조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죽산길 103 1984-02-29 국유 높이 305cm, 광배높이 110cm, 광배너비 100cm, 머리높이 60cm, 머리너비 40cm, 어깨너비 90cm, 가슴너비 38cm 고려시대(중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7. 석곡리 석불입상.jpg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에 있는 이 석불입상은 무릎 이하가 매몰되었지만 거대한 석불상의 예로 주목을 끌고 있다. 머리광배와 불신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평평한 돌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마멸이 심해 세부 수법은 잘 알 수 없으나 민머리 위에 있는 팽이 같은 머리묶음, 목에 있는 3줄의 삼도(三道) 등은 비교적 뚜렷하다. 체구는 건장하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굵은 옷주름이 양쪽 팔로 흘러내렸는데 역시 세부표현은 뚜렷하지 않다. 원형의 머리광배에는 아무런 무늬도 새겨지지 않았다.  마멸이 심해서 양식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한 지방석불상의 예로 생각된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135(오지리 463) 1984-02-29 사유 352㎡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8. 도동묘.jpg 도동묘는 안호가 조선 숙종 2년(1676)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인 안향과 중국 송나라 주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안향(1243∼1306)은 고려시대의 명신이며 학자로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이며, 지금의 경북 영주군 풍기인 흥주의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었으며, 충렬왕 15년(1289)에는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오기도 하였다. 사당 안에는 주자와 안향의 초상화가 놓여 있으며, 용의 모습을 한 향로와 술잔이 있다. 해마다 봄(3월 15일)과 가을(9월 15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사적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음지길 8-3(덕산리 산 27) 1984-02-29 사유 853㎡ 조선시대(1928년 중순)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39. 덕산사.jpg 고려 예종 때 원수 윤관(∼1111) 장군과 부원수 오연총(1055∼1166)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윤관은 고려 문신으로 고려와 여진족이 자주 충돌하자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격파하고 9성을 쌓았다. 오연총은 고려의 문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후 병부낭중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고려 예종 2년(1107) 원수 윤관과 함께 여진정벌을 나섰고 9성을 쌓았다. 원래 조선 선조 16년(1583)에 함경도 경성에 지은 이 사당은 1935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유교건축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5길 14(오지리 1000) 1986-09-29 사유 1207㎡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0. 수성당.jpg 조선 고종 12년(1875)에 지은 건물로, 처음에는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바닥은 온돌과 우물마루를 방과 대청에 각각 시설하였다. 건물 앞 정원에는 연못과 소나무·은행나무 따위의 나무들이 많이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유교건축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봉정길 74-4(봉정리 522) 1988-12-21 사유 1534㎡ 근대(1917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1. 영류재.jpg 이곳은 함안 조씨 문중에서 1917년 세운 재각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뿐만 아니라 마을의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2층 기단 위에 세워 마당보다 높다. 건물 중앙에 있는 대청마루는 사람이 모일 때 문을 위로 들어 올려 넓은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꾸몄다.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건물 주위에는 각종 나무와 정원석, 연못이 있다. 나무를 다듬은 수법과 서로 짜 맞춘 기법이 매우 우수하며 전형적인 재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로 관리와 보존이 양호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불탑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1988-12-21 국유 높이 417cm 고려시대(전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2. 태안사 삼층석탑.jpg 태안사 내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절 내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인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회화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135(오지리 463) 2004-02-13 사유 그림크기 49.8cmX85.5cm전체크기 58.5cmX122.5cm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3. 곡성 도동묘 안향영정.jpg 곡성 도동묘에 소장된 안향(1243∼1306)의 영정이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초명은 유(裕),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를 공부하고 돌아와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널리 제자를 양성하여 그 이후 우리나라에 유학이 크게 성행하였다. 도동묘 안향 영정은 소수서원에 모셔진 안향 영정(국보 제111호)을 1660년에 이모한 작품이다. 영정 모사를 주관했던 안응창은 영정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흠모의 정을 더하여 당대 거유들의 찬문을 덧붙여 후손으로서의 자랑스러운 마음을 덧붙여 표현한 작품이다. 이 영정은 붉은색 옷에 검은 복두를 쓴 모습으로 상반신만 그렸다. 얼굴을 악간 돌려 좌측을 향한 우안 구분면으로 의습의 필치는 유약하고 군데군데 끊긴 흔적이 있다. 영정의 상단에는 여러 사람의 찬문이 덧붙여져 있다. 찬문을 쓴 사람은 김상헌(1570∼1652), 신익성(1588∼1644), 이경석(1595∼1671), 홍서봉(1572∼1645)으로 모두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 타계한 상태이어서 이 찬문들은 영정을 모사하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앞서 지은 찬문들을 영정 모사시에 덧붙여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곡성 도동묘에 소장된 안향의 영정은 1660년경에 이모된 작품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이모본이지만 초상화로서는 오래되었고, 원작품과 이모본의 비교연구에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있고, 당대 문인들의 찬문을 덧붙여 역사적 가치가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석조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당동길 36-7 2005-07-13 국유 높이 158cm(원 200cm), 불신높이 70cm, 어깨너비 52cm, 가슴너비 20cm, 무릎높이 26cm, 무릎너비 83cm 고려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4. 곡성 전화장사지 석불좌상.jpg ‘한적골’의 화장사지에 있던 불상이다. 원래 터는 경지정리되면서 지형이 변했고, 도난으로 불상의 목이 부러지는 등 훼손이 심하여 옮겨왔다. 훼손되기 전 얼굴 모습은 소발에 육계가 있고, 짧은 양귀와 목에는 삼도가 나타났다고 한다. 법의는 통견을 둘렀고, 가슴에서 복부까지 ‘U’자형의 의습이 반복되고 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이다. 대좌는 앙련을 새긴 상대석과 복련을 새긴 하대석을 갖추었다. 특히 하대석의 연꽃무늬는 조각이 뚜렷하고 힘이 넘친다. 전체 높이는 200cm, 어께너비 52cm, 무릎너비 83cm이다. 대좌의 연화문, 법의자락과 넓고 높은 무릎 등의 전체적인 형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조성된 불상이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회화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3길 16-1(오지리 434) 오강사 2017-07-27 사유 초상 87.0cmX55.3cm, 족자전체 110.0cmX63.6cm 근대(1905~1921)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5. 곡성 오강사 최익현 초상.jpg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의 작품으로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과 서양의 음양법을 잘 조화시켜 실제 인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이다.비단에 채색한 정면좌상으로 최익현 74세 초상화를 이모사(移摹寫). 얼굴과 손에 사용한 황토 배채법(背彩法)이나 섬세하게 육리문(肉理文)을 표현한 점, 정자관과 화문석 등의 묘사력이 뛰어나 역사적, 예술적 가치 있다. 061-363-2011
무형문화유적 업무시설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232(오지리 770-5) 2004-12-31 국유 1층, 건축면적 역사(216.19㎡), 창고(189.50㎡)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6. 구 곡성역사.jpg 구 곡성역은 2동, 1층 규모로 역사 건축면적 216.19㎡, 창고 건축면적 189.50㎡이다. 구 곡성역은 전라선로의 역사로 1933년에 건립되었으며 등록된 간이역중 규모가 큰편에 속하며., 1933년 10월 15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하였다. 1999년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이전하면서 폐역되었다. 지붕형태는 박공이 양쪽에 설치되었으며, 전면은 입구에 배면는 사무실쪽에 배치되어 있다. 구조는 목조에 맞배지붕으로 2001년 등록전 보수시 지붕재료와 벽체 일부가 변형되었다. 내부에는 난방시설이 대합실과 사무실 사이에 위치하며 굴뚝이 지붕위에 조적되어 있다. 역사 및 주변부지를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활용중에 있으며, 레일바이클등 폐역된 간이역 중 가장 모범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종교시설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영운1길 33(학정리 96) 2005-12-09 국유 1층, 연면적 22.05㎡ 1931년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7. 곡성 단군전.jpg 1931년 건립이 건물은 단군왕검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3·1운동 당시 곡성에서 만세를 주도했던 신태윤(1885~1961)이 후학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건립하였다. 일제 치하에서도 개천절에 국민들이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이며, 익공은 연꽃과 봉오리가 초각되었고 보머리는 봉황 머리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061-363-5156
유형문화유적 업무시설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원등1길 63 2005-12-09 사유 1층, 연면적 137.82㎡ 1948년경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8. 곡성 구 삼기면사무소.jpg 1948년 무렵 건립 이 건물은 삼기면 사무소로 건립되었으며, 지금은 우체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간 구성이 단순하며 외관은 전면 중앙의 주 출입구 위쪽에 박공 면을 만들어 정면성을 강조한 당시의 전형적인 면사무소의 평면 형태와 외관을 갖추고 있다. 061-363-2011
유형문화유적 종교시설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미술관로 287(옥과리 650) 2017-12-05 국유 각 1층  안심당 226㎡, 육화당 207㎡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49. 곡성 성륜사 안심당·육화당.jpg 1920년 구례 지역의 상류가옥인 국포고택을 1987년 이축한 건축물로서 전통한옥 건축형식을 기본으로 근대기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근대적 건축기법을 부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한옥의 시대적 변용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근대기 활동한 남종화의 거장인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1922∼2014) 화백이 전통문화예술 교육과 창작을 위한 전승공간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곳으로 판단된다. 061-363-0081
유형문화유적 승탑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 1963-01-21 국유 13,047.4㎡ 구비 : 통일신라 872년(경문왕 12년, 함통 13년)신비 : 1928년 9월 9일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0.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비.jpg 불가에서 승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돌로 만든 묘탑(墓塔)에 안치하는데 이를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 부른다. 탑비는 이러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것으로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일생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고려시대에는 역대 국왕이 고승들을 존경하여 그들이 사망하면 장사를 후하게 치르고 아울러 시호(諡號)와 탑명(塔名)을 내리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문장가와 명필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하였다.탑비는 경문왕의 왕명으로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한림랑(翰林郞) 최하(崔賀)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와 삼랑사비문 그리고 흥덕왕릉비문을 쓴 이로 알려진 중사인(中舍人) 요극일(姚克一)이다. 요극일은 여러 개의 승려 비문을 썼는데 통일신라시대에 구양순체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적인선사 혜철의 탑비는 현재 남아 있는 남종선 선승의 탑비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미 813년에 신행선사의 비가 단속사에 건립되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볼 수 없고 혜철스님의 탑비 뒤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884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887년),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890년)들의 비가 잇달아 모셔진다.  061-363-6622
유형문화유적 불상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성덕관음길 453 1936-02-21 국유   일제강점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1. 관음사 금동관세음보살 좌상.jpg 일제강점기 1933년 8월 9일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이 제정되면서 문화재가 지정이 된다. 유형별로 분류하여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로 구분해 지정하고 지정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오늘날 지정 번호의 유래이다. 지금처럼 시·도에서 지정하는 지방문화재 지정 제도는 없었으니 국가지정문화재 성격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제도를 도입할 때 일본에 소재한 것은 “국보” 용어를 썼고 우리나라 문화재는 “보물”로만 한정하였다. 이때 곡성 소재 문화재도 2건이 보물로 지정이 된다. 관음사 금동관세음보살 좌상(1)과 관음사 원통전(2)이다.이 관음사의 두 문화재는 6·25한국전쟁기에 불에 타고 만다. 지정격이 ‘보물’인 상태에서 불에 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국보’가 불에 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후 1952년 12월 19일「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임시보존위원회」가 문교부장관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가 1955년 6월 28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로 발족된다. 이때 기존의 ‘보물’을 ‘국보’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지금처럼 “보물 중의 보물=국보”로서가 아니라, “보물=국보”로 용어만 바뀐 것이다. 그렇더라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소재 문화재만 ‘국보’로 썼던 것에 비기면 의미상으로는 승격인 셈이다. 당시 전국 419점이 국보가 된다.관음사의 두문화재는 이미 불에 타고 없는 상태에서 ‘보물’에서 ‘국보’로 바뀌어 지정상태는 유지되어 목록으로 관리된다. 이처럼 두 가지 시기가 서로 다른 내용이 섞여서 “국보 관음사 문화재가 한국전쟁기에 불에 탔다”는 이야기가 전하게 된 것이다. 불에 타서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원통전은 7년, 보살상은 12년여를 문화재 지정격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원통전은 2년, 보살상은 8년여를 ‘국보’로 목록으로만 관리되었던 것이다. 올바로 정리 하자면, “관음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1)과 관음사 원통전(2)은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한국전쟁기에 불에 타 유실되었다. 불에 타 없는 상태에서 1955년에 ‘국보’로 지정 유형 명칭이 변경되어 승격의 의미가 부여되었고, 원통전은 1957년에, 보살상은 1962년에 지정이 해제 되었다.”이다. 관음사 두 문화재 사례는 불에 타고 없는 상태에서 ‘국보’ 지정격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사례이다. 061-362-4433
유형문화유적 목조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성덕관음길 453 1936-02-21 국유   일제강점기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2. 관음사 원통전.jpg 일제강점기 1933년 8월 9일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이 제정되면서 문화재가 지정이 된다. 유형별로 분류하여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로 구분해 지정하고 지정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오늘날 지정 번호의 유래이다. 지금처럼 시·도에서 지정하는 지방문화재 지정 제도는 없었으니 국가지정문화재 성격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제도를 도입할 때 일본에 소재한 것은 “국보” 용어를 썼고 우리나라 문화재는 “보물”로만 한정하였다. 이때 곡성 소재 문화재도 2건이 보물로 지정이 된다. 관음사 금동관세음보살 좌상(1)과 관음사 원통전(2)이다.이 관음사의 두 문화재는 6·25한국전쟁기에 불에 타고 만다. 지정격이 ‘보물’인 상태에서 불에 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국보’가 불에 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후 1952년 12월 19일「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임시보존위원회」가 문교부장관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가 1955년 6월 28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로 발족된다. 이때 기존의 ‘보물’을 ‘국보’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지금처럼 “보물 중의 보물=국보”로서가 아니라, “보물=국보”로 용어만 바뀐 것이다. 그렇더라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소재 문화재만 ‘국보’로 썼던 것에 비기면 의미상으로는 승격인 셈이다. 당시 전국 419점이 국보가 된다.관음사의 두문화재는 이미 불에 타고 없는 상태에서 ‘보물’에서 ‘국보’로 바뀌어 지정상태는 유지되어 목록으로 관리된다. 이처럼 두 가지 시기가 서로 다른 내용이 섞여서 “국보 관음사 문화재가 한국전쟁기에 불에 탔다”는 이야기가 전하게 된 것이다. 불에 타서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원통전은 7년, 보살상은 12년여를 문화재 지정격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원통전은 2년, 보살상은 8년여를 ‘국보’로 목록으로만 관리되었던 것이다. 올바로 정리 하자면, “관음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1)과 관음사 원통전(2)은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한국전쟁기에 불에 타 유실되었다. 불에 타 없는 상태에서 1955년에 ‘국보’로 지정 유형 명칭이 변경되어 승격의 의미가 부여되었고, 원통전은 1957년에, 보살상은 1962년에 지정이 해제 되었다.”이다. 관음사 두 문화재 사례는 불에 타고 없는 상태에서 ‘국보’ 지정격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사례이다. 061-362-4433
기념물 건조물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주마천목길 121-2 2019-12-26 국유   조선시대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3. 곡성 마천목 묘와 재실.JPG 마천목 묘소는 장방형의 형태로 묘표, 무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무덤 주변에 곡장(曲牆)이라는 담을 두른 형태로 조선 초기 묘제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재실(영모재)은 가구 구조나 치목 수법이 뛰어나고, 사당(충정묘)은 보물 제1469호인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을 보관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충정공 마천목은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로 1400년(정종2)에 태종 이방원을 도와 왕자의 난을 평정했다. 그 공로로 1401년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추대됐고, 1429년(세종 11)에는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마천목은 부친 마영(馬榮)과 모친 평산 신씨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모친이 곡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마천목은 15세가 됐을 때 외가가 있는 곡성군 오지면 당상촌으로 거처를 옮긴 뒤 정계에 진출, 좌명공신에 추대돼 지금까지 곡성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출처 : 조선일보(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28/2020012802158.html) 02-2279-3810
유형문화유적 자연유산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설옥길 81-158 (설옥리) 1987-06-01 사유 (수량)2주   https://smart.gokseong.go.kr/pictures/유적지/54. 수도암 잣나무 및 매화나무.jpg 잣나무는 울릉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라고 있으며 흔히 공원이나 정원에 심는다. 중국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소나무라는 뜻으로 해송(海松), 신라가 중국으로 잣을 수출했기 때문에 신라송(新羅松)이라고도 한다.매화나무는 가지가 초록색이며 잎은 어긋나고 계란형으로 끝이 뾰족하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며 연한 홍색이 도는 흰빛으로 향기가 강하다. 추위가 덜 가신 초봄에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봄소식을 알려주는 나무로 아낌을 받아왔다. 특히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많이 재배하였고, 시나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하였다.수도암 앞 마당에는 잣나무와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에 언제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잣나무의 나이는 1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5m, 둘레 2.30m이다. 매화나무의 나이는 1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15m, 둘레 1.12m이다.수도암은 곡성군 옥과면의 설산(522m) 남쪽 허리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신라시대 설두화상이 도를 닦던 곳으로 전해지나 그 당시 건물은 없고 1928년 임공덕 보살이 지은 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061-363-2011



■ 관련 자료

전라남도 곡성군_문화재지표_유적지_20240620.xlsx
0.05MB
곡성군_유적지_.kml
0.01MB




■ 링크

원본 자료의 관련 링크는 아래와 같다.

https://www.data.go.kr/data/15098537/fileData.do

 

전라남도 곡성군_문화재지표_유적지_20240620

전라남도 곡성군의 문화재지표중 유적지 데이터 정보(향토문화 유적명, 문화유적 지정번호, 향토문화유적구분, 향토문화 유적 종류, 소재지 도로명 주소, 위도, 경도, 문화재 지정일자 등)

www.data.go.kr

 



■ 기준 날짜

 2024.6.20

반응형